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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설교문 예시

열왕기상 19장 1-8절 설교문 예시

by 진심설교코치 2023. 2. 28.

 

탈진(Burnout)
왕상 19:1-8

 

 

 

 

Opener. 하나님의 언약은 그냥 무작정 흘러가지 않는다: 엘리야

 

 

오늘 우리가 보는 성경 말씀은 하나님의 구원의 이야기, 하나님께서 그 백성과 언약을 어떻게 유지하시는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기계적으로 흘러가지 않습니다. 그 이야기는 사람이 각자의 역할을 가지고 써내려갑니다. 거대한 줄기에선 그 사람이 잘 보이지 않지만, 가만히 드려다보면 하나님의 거대한 이야기는 결국 한 사람, 한 사람이 이야기로 써져갑니다. 마치 종말을 향해가는 영광스러운 교회 시대지만, 그 속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이 이야기를 그 역사를 써내려가고 있듯이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거대한 구속사 속에서 살아가는 한 사람을 집중해보려 합니다. 우리와 같은 사람 엘리야입니다. 

 

 

 

Chapter 1. 승리 후에도 도망쳐야 하는 엘리야의 상황 

 

 

지금 엘리야는 허둥지둥 도망치고 있습니다. 선지자가 채통도 없다 할지 모르겠지만, 지금 그에게 중요한건 그런게 아닙니다. 엘리야 자신도 도망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며 어색했을 겁니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엘리야는 자신이 도망치고 있을줄은 몰랐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온 이스라엘에 알리기 위해 투사와 같이 싸웠습니다. “내가 섬기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오늘 아합에게 보이리라!” 왕 앞에서도 주눅들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선지자로 사는 일에 최선을 다했고, 거기엔 하나님을 향한 열심으로 가득했죠. 갈멜산에서 그는 놀라운 승리를 맛봤습니다.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선지자들 850명과의 대결에서 승리했고, 그의 눈 앞에서 큰 불이 내려와 자신 앞에 있던 번제단을 불살랐습니다. 물론 믿었던 일이었으나 소름끼쳤을 겁니다. 온 백성들이 보고 있는 자리였습니다. 여호와께서 바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라는 역사적 사건이었죠. 

 

 

 

Chapter 2. "아, 그만하고 싶다. 그냥 죽고 싶다." 

 

 

그러나 그는 지금 도망치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번제단이 불타올랐고, 엘리야는 승리하였습니다. 그러나 달라진건 없었죠. 실질적 권력을 휘두르는 이세벨이 엘리야를 죽이겠다고 협박했기 때문입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죽이겠다는 협박에 엘리야는 서둘러 간단한 짐을 싸서 도망칩니다. 

 

그리고 그는 브엘세바, 이스라엘의 남쪽 도시로 도망칩니다. 살기 위해, 이세벨의 손에 죽지 않기 위해 바삐 걸음을 옮겼습니다. 브엘세바에 도착한 엘리야는 함께온 시종을 브엘세바에 남겨두고, 광야로 나갑니다. 아무것도 없고, 아무도 없는 광야길을 터벅 터벅 하루종일 걸어 갑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그는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는 광야에서 자신의 키 정도 되는 앙상한 로뎀나무 아래로 기어 들어갑니다. 이상하죠. 살려고 도망쳐왔으나, 막상 그를 뒤덮는 것은 “그만하고 싶다”하는 마음이었습니다. 죽음이 두려워 이 자리까지 도망쳐왔으나 막상 도망쳐보니 사는게 더 두렵다는 것을 문득 알게 됐을 겁니다.

 

그는 덤불 밑에 누워 조용히 입을 엽니다. “하나님, 충분합니다. 이제 제 목숨을 거둬주십시오.” “더는 못하겠습니다. 죽는 것보다 사는게 두렵습니다.”

그리고 마치 모든 것이 끝났다고 체념한 사람처럼 그는 잡니다. 엄청난 체력 소비, 두려움, 배고픔. 무엇인지 다 이해할수도 없는 것들이 엘리야를 휘감았고, 그는 탈진한채 잠이 들어버립니다. 기절하듯 말입니다. 

 

저는 어쩌면 이 엘리야의 모습이 오늘을 사는 우리의 모습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선지자의 이야기니 사역자 정도 되는 사람들의 이야기일까요? 아닐겁니다. 왜냐하면 엘리야와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모든 것이 돈과 자랑으로 귀결되는 바알의 세상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딜 봐도 신앙이 설 자리가 없는 세상입니다. 주일만큼은 무언가 될 것 같이 마음에 확신으로 다가오지만, 마주하는 세상은 지나치게 큽니다. 강합니다. 주님과의 첫사랑을 기억하며 걸어보지만 그때와 달리 주님과 함께 걷는 길조차도 먼지가 날리는 메마른 광야 같습니다. 말씀을 듣고, 성경을 보고, 기도해도 나도 세상도 변하지 않는 것 같으니 죽을 지경입니다. 말씀이 먼 나라 이야기 같고, 지금 나에겐 너무 멉니다. 이게 우리가 종종 혹은 빈번하게 마주하는 현실 아닙니까? 그래서 지칩니다. 영적 탈진입니다. 

 

그뿐입니까? 바쁩니다. 쉴수가 없습니다. 더 어른이 되면 나으려나 생각하지만, 막상 세월이 흘러도 내가 책임지고 짊어져야 할 짐들은 늘어갑니다. 오히려 내가 맘대로 할수 있는 일도 없고, 그 무엇도 내 마음 같지가 않습니다. 코로나로 2년의 시간이 흘러가지만 도무지 출구가 보이지 않습니다. 장사도 안되고, 지갑 사정은 팍팍해져만 갑니다. 거기다 건강도 예전 같지 않고, 여기저기 아픕니다. 누우면 걱정거리들이 하나 둘 떠올라 잠들지 못합니다. 

 

문득 정말로 죽는게 무섭지만, 사는게 더 무서운 날도 있습니다. 너무너무 살고 싶지만, 살 자신이 없는 날이 있죠. “아 사는게 정말 너무 너무 힘듭니다 주님. 주님 그냥 다 그만하고 싶습니다.” 오늘 이야기의 엘리야처럼요. 

 

여러분도 그렇지 않으십니까?

 

 

 

Chapter 3. 언약이 이어가는 방식: 하나님이 살리셨더라. 

 


그런데 이렇게 탈진한 엘리야에게 주님은 어떻게 하십니까?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정신차리라고 혼내지 않습니다. 믿음이없다고 꾸지라지 않으시죠. 주의 천사가 엘리야를 찾아옵니다. 그리고 자는 건지, 자야하는 건지 알수 없는 그의 등을 어루만집니다. 더 자게 두고 싶지만, 뭐라도 먹어 힘냈으면 좋겠는 엄마의 심정일까요? 엘리야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립니다. “네가 힘들구나. 무섭구나. 죽고 싶을만큼 절망스럽구나.” 

 

천사는 따뜻하게 구운 빵과 물을 가져왔습니다. 엘리야는 잠결에 일어나 먹고 다시 잠듭니다. 얼마가 지났을까요? 다시 천사가 왔습니다. 그리고 또 다시 토닥토닥 두드리며, 구운 빵과 물을 줍니다. 등을 쓸어 내리기도 하고, 볼을 쓰다듬기도 하고, 언제 흘렸는지 알수 없는 눈물 자국도 손으로 부드럽게 닦아 냅니다.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다시 엘리야는 그 광야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빵과 물을 먹습니다. 

 

하나님은 엘리야를 괘씸하게 보시지도, 겁쟁이라고 무시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아무도 본 사람도 없고, 보이지도 않게 덤불 아래 숨어 잠들어 버린 그를 보시고 그에게 찾아오셨습니다. 사실은 한 시도 눈을 뗀 적이 없으십니다. 그의 고단함을 아시고, 탈진해 버린 그의 몸과 마음을 토닥이고, 먹이시며 다시 일으켜 세우십니다. 

 

묻지도 않으십니다. 잘한 것과 잘못한 것? 지금은 그것이 중요한 때가 아닙니다. 그저 그를 다독여 살게 하십니다. 그 마음을 충분히 아시기에 측은한 마음으로 따뜻한 빵과 물을 준비하셨습니다. 이 이야기는 그렇게 또 멋있게 흘러갑니다. 엘리야가 죽었더라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살리셨다로 이야기를 이어가십니다. 

 

 

 

Closing. 울부짖음은 '믿음 없음'이 아니라 '믿음의 호소'다.

 

 

성도 여러분, 사는게 힘이 드시죠? 저도 힘이 듭니다. 저마다 상황이 다르고, 사정이 다릅니다만 누구 하나 편안하기만 삶이 어디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의 마음, 하나님이 다 아십니다. 충분히 아십니다. 만약 마음이, 몸이, 영혼이 탈진해버렸다면 아닌 척 하지 마시고, 하나님께 힘들다고. 사는게 너무너무 무섭다고 말하십시오. 

 

우리가 신앙 생활 오래했고, 다 큰 어른이고 그건 중요한게 아닙니다. 이건 믿음 없음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살게 하시는 분이라는걸 우리가 굳게 믿고 있기에 뱉을 수 있는 믿음의 호소 아니겠습니까? 

 

설사 우리가 탈진하여 어디 구석에 숨어버리더라도 하나님은 우리가 어디있는지 아시며, 반드시 찾아오실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을 토닥이시며 또 다시 살아갈 격려와 위로와 도움을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죽었더라”가 아니라 “살았더라”로 우리의 인생을 또 다시 인도해가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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