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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설교문 예시

출애굽기 3:1-5, 13-14 설교문 예시

by 진심설교코치 2023. 2. 23.

 

불과 떨기나무(Fire and Bush)
출애굽기 3:1-5, 13-14


 

 

Opener. 신앙권태감을 해소하기 위한 만남

 

 

우리는 늘 하나님을 의지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믿어야 한다고 우리 마음을 다짐합니다. 옳죠.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어야 합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자!”고 하면서, 의지해야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에 대해 모르고 있다면 어떻게 될까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라는 책에서도 이 점을 지적해요. 어떤 분인지 모르는 하나님을 “의지하자, 의지자”라고 한다면, 하나님을 알려고 하는 시도들이 현격히 줄어들고, 오히려 그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태도(의지하자! 믿자!)만 강조하다보니 결국 우리의 신앙 생활 안에 종교적 의무만 남게 된다는 거예요.

 

그러니 하나님을 의지해야하는데 의지가 되지 않는 자신을 탓하고, 믿어야 하는데 믿어지지 않는 우리 자신을 탓하면서, 신앙의 권태로 들어가는 겁니다. 

 

신앙의 권태감이 있는 분들 있죠? 잘 믿고 싶은데, 뭘 믿어야 하는지 모르겠는 사람도 있죠? 오늘 말씀에 귀를 기울여 보시길 바랍니다. 우리는 오늘 이 본문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생각해보려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영원히 알아가야 하는 분이시기에 다 알 수 없지만, 조금이나마 또 알려합니다. 떨기나무 가운데 불로 임하신 하나님을 보기 위해, 모세와 하나님이 만나는 그 광야로 함께 들어가보겠습니다. 

 

 

 

 

Chapter 1. 불타고 있으나 불타지 않는 떨기나무 앞에서 만난 하나님

 

 

 

애굽 사람을 죽인 모세는 애굽을 빠져나와 장인의 집에 살고 있습니다. 애굽의 왕자라는 영광은 사라진지 오랩니다. 그저 덥수룩하게 기른 수염, 아주 평범한 목자의 작업복을 입고, 오늘도 양을 치고 있습니다. 어느덧 양을 친지 40년이 된 베테랑 목자입니다. (상세한 묘사는 네러티브에 더욱 집중할 수 있게 해줍니다 + 현재형 표현도 그런 이유입니다)

 

양을 이끌어 서쪽으로 갑니다. 그러다가 호렙산에 이르게 됩니다. 그런데 아주 진기한 장면을 보게 되죠. 떨기나무에 불이 붙어버렸습니다. 사막에서 나무가 불타는 일은 종종 일어난다고 합니다. 너무 건조한 광야에서 태양으로 인해 지면에 온도가 극도로 올라 가면, 나무에 불이 붙는 것이죠. 그러니 나무가 불타는 일은 40년간 양을 치며 살았던 모세에게 아주 새로운 일은 아닐 겁니다. 그런데 진기한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는데 그 나무가 타지 않는 것입니다. 

 

이 떨기나무는 우리가 주변에서 쉽게 보는 소나무같은 나무가 아닙니다. 나무라고 하기에는 작고, 잔 가지가 많은 나무입니다. 만약 불이 붙었다면 잔가지가 많은 이 떨기나무는 순식간에 다 타서 재만 남겠죠. 그런데 지금 이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음에도 불구하고 멀쩡합니다. 그리고 불은 꺼지지도 않습니다. 

 

만약 우리 눈 앞에 이런 일이 일어나면 얼마나 신기하겠습니까. 그렇죠? 모세도 그랬어요. 살면서 한 번도 본적이 없는 일이니까요. 떨기나무에 불은 계속해서 타고 있으나, 떨기나무가 타지 않는 말도 안되는 일이었으니까요. 그래서 자세히 보고자 하여 가까이 갑니다. 

 

그 불을 가까이서 보기 위해 모세가 다가가자, 드디어 하나님께서 불꽃 가운데로부터 모세를 부르십니다. 그리고 이 땅은 거룩하니 신을 벗으라고 합니다. 왜 이 땅이 거룩할까요? 6절에 보면 알수 있습니다. 지금 그 자리에 하나님이 나타나셨기 때문입니다. 

 

(한숨 고르고)

지금 떨기나무에 붙은 불 가운데 임한 하나님과 모세가 만났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애굽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건져내라는 요구를 하러 오셨어요. 그러니 이제 모세가 다시 40년 만에 애굽으로 들어가야 하는 것이죠. 그런데 이때 모세가 질문합니다. “하나님, 그 사람들이 “너(모세)를 부르신 하나님의 이름이 무엇인가? 누가 너를 보냈는가?” 물으면 뭐라 답해야합니까?”라고 하나님의 이름을 묻습니다. 

 

그런데 이 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하나님 자신을 어떻게 소개하시죠? 14절입니다. “스스로 있는 자”라고 합니다. 

 

 

 

 

Chapter 2. 사람은 의존적인 존재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스스로 있는 자는 무슨 의미일까요? 영어를 번역하면 “나는 나다”입니다. 나는 그냥 나라는 것이죠. 얼마나 우스운 이름입니까. 그러나 여기에는 우리가 주목해야 할 내용이 있습니다.

 

 

먼저 우리의 이름을 생각해볼까요? 우리의 이름이라는 건 얼마나 우리가 의존적 존재인지를 보여줍니다.

 

저의 이름은 제가 지은 이름이 아닙니다. 만약 그랬다면 절대 지금과 같은 이름을 안 지었을 겁니다. 다소 평범하거나, 인플루언서가 되기에 유리한 이름을 지었을 겁니다. 제 이름의 성은 수 세기를 걸쳐 내려온 아버지와 아버지 그 아버지와 그 아버지의 성을 물려 받은 거고, 이름은 제가 맨날 잠만 자는 신생아 때, 어머니께서 지어주신 거예요. 

 

이 세 글자의 이름은 제가 누군가의 아들이라는 사실과 누군가의 바람을 담아 태어난 사람이라고 설명하는 것이죠. 그리고 저 스스로 지은 이름이 아니라는 것은 저는 스스로 태어나지도, 스스로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음을 이미 제 이름이 증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뿐입니까? 우리는 자기를 소개하라고 할 때 무엇을 소개합니까?

 

나는 어디 출신이고, 어디 학교를 나왔고, 직업이 무엇이고, 결혼은 했고, 애가 몇 명 있고, 지금은 어디에 산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소개하는데 사실 나를 소개한다기보다, 내 주변에 대한 소개를 해야합니다. 사람은 이렇게 의존적입니다. 다른 무언가를 끌어 와야만 자신의 존재를 설명할 수 있어요.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해 이재철 목사님이 하셨던 인상깊은 설교가 있어요.

 

“사람은 누군가의 손을 빌어 태어난다. 누군가가 손을 내밀어 받아주지 않는다면 죽고만다. 인간은 죽을 때도 누군가의 손을 빌어 이 세상을 떠난다. 누구에게 빚을 지고 태어나, 빚을 지고 떠나는 빚쟁이들이다.”

 

사람은 그런 존재인 것이죠. 이름이 증명하듯, 인간의 생사가 증명하듯 사람은 무엇인가에 의존해야 하는 존재인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오늘 자신의 이름을 “스스로 있는자”라고 소개합니다. 누군가에게 받은 이름이 아닙니다. 누군가의 바람을 담은 이름도 아닙니다. 그 이름에 출신과 집안의 정보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있는 존재라는 말입니다. 라는 존재는 다른 그 무엇으로도 설명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은 그냥 “나”인 것이죠. 

 

떨기나무가 그것을 보여주고 있지 않습니까? 불은 의존적입니다. 불이 혼자 탑니까? 아닙니다. 산소와 연료와 온도가 있어야 불꽃이 입니다. 불 탄다는 것은 그 주변에 산소가 타들어가는 것이고, 연료가 타 들어간다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불이 나면 모든 것이 그 불의 연료가 되어 재만 남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모세 앞에 있는 떨기나무가 타지 않습니다. 불이 타려면 연료가 필요한데, 하나님의 불은 떨기나무를 태우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연료가 무엇일까요? 바로 하나님 자신입니다. 하나님을 소개하는 이 불은 아무것도 태우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재로 만들지 않습니다. 연료가 필요 없습니다. 그 불은 아무 것에 의존하지 않고, 혼자 탑니다.

 

하나님은 이 불과 떨기나무로 자신을 설명하신 겁니다. 사람은 나를 설명할 때 온갖 주변을 늘어 놓아야 자기 설명이 되는데, 하나님은 그 어떤 것도 필요가 없으시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홀로 존재하신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필요한 모든 것은 하나님 스스로에게서 나오고, 스스로 만족하신다는 겁니다. 그 어떤 것도 하나님 안에 없는 것이 없고, 하나님은 하나님 자체로 이미 완벽하고, 영광스럽고, 찬란하며, 충만하다는 말입니다. 

 

그 이름이 무엇이라고요? “나”입니다. “스스로 있는 자”입니다. 우리 하나님입니다. 

 

 

 

 

Chapter 3. 스스로 있는 자가 스스로 존재 할 수 없는 자의 하나님이 되시다. 

 

 

 

그런데 오늘 본문 뒤에 그 스스로 있는 자이신 하나님께서 스스로 존재하지 못하는 인간에게 이렇게 말하죠.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을 데려다가 “아름답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데려가려한다. 무슨 말입니까? 스스로 있는 자께서 이 스스로 있을 수 없는 인생의 하나님이 되어주시겠다는 겁니다. 절대 의존해야하는 우리에게 그 의존의 대상이 되어 주시겠다는 것이죠. 아무리 가져도 부족하고, 아무리 마셔도 목마른 인생을 불러서 함께 하시며 그 만족함이 되시겠다는 겁니다. 

 

여러분 현실적으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데려가신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아닙니다. 이른 비와 늦은 비가 오지 않으면 굶어죽기 딱 좋은 땅입니다. 그럼에도 거기에 젖과 꿀이 흐르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스스로 계시는 하나님께서 거기서 그들과 함께 하시기 때문이죠. 모든 것에 충만하신 분이, 다함이 없는 분이 그 땅에서 그 백성과 머무시기 때문입니다. 

 

태양이 그로부터 나왔고, 바다가 그 분으로부터 나왔고, 이 세상에 살아가는 모든 인생이 그 하나님으로부터 나왔고, 온 우주가 하나님의 넘치는 충만에서 쏟아져 나왔는데, 그 분이 그 백성과 함께 하신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 분이 함께 하시는 자리가 젖과 꿀이 흐르는 푸른 초장이 되고, 가정이 되고, 인생이 되는 것이죠. 아름다운 땅이 되는 것입니다. 땅이, 현실이, 눈에 보이는 것이 아름다워서가 아닙니다. 스스로 있는 자와 늘 의존해야하는 인생이 함께 할 때, 거기가 천국이 되는 것이죠. 

 

 

 

 

Chapter 4. 복음의 시작은, 내가 스스로 있는 자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는데서 시작한다. 

 

 

 

우리는 자주 착각합니다. 우리가 스스로 있는 자라고.

 

이건 아담 이후로 모든 인간의 환상이었습니다. 나의 삶은 내가 만들고, 나의 삶은 내가 주인이라고요.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절대 스스로 존재하지 못합니다. 생각해보세요. 우리의 계획은 몇 년을 표류하고, 때론 버려집니다. 내가 되고 싶은 나를 꿈꾸지만, 몇 해를 걸쳐 수정하게 되고, 왜 계획을 변경할 수 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여러 변명과 합리화를 거쳐 지금의 나를 맞이하게 됩니다. 세상은 커녕 나 조차도 내가 어찌 할 수 없는 씁쓸한 현실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우리는 ‘아 내가 대단한 사람이 아니구나’라는 걸 뼈저리게 알게 됩니다. 나의 삶에 내가 주인이 될 때, 얼마나 비참한지 우리는 우리 자신을 알아갈수록 더욱 확신하게 되는 것이죠. 

 

그 뿐입니까? 우리는 다른 것들을 덕지덕지 붙여서 스스로 존재하는 자와 같이 되려합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스스로 존재할 수 없는 존재라는 걸 들키고 싶어하지 않아요. 그래서 돈을, 명품을, 직함을, 좋은 차를, 좋은 아파트를, 좋은 대학교를, 훌륭한 자식을, 내가 이런 사람이라고 옆에 두고 나를 꾸밉니다. 마치 비참한 자리에서 나뭇잎을 엮어 자신의 부끄러움을 가리려했던 아담과 하와처럼 말입니다. 하나님을 버리고서는 고작 선택한 것이 나뭇잎 몇장인 거죠. 그렇게 인간은 구차한 자존심을 지켜가며, 나뭇잎을 세게 붙잡습니다.

 

이건 예전이나 지금이나 인간의 망상이죠. 우리의 착각입니다. 우리는 결코 스스로 무언가가 될 수 없어요. 또 어떤 것을 우리의 삶에 꾸역꾸역 채워 넣어도 그건 되려, 우리가 스스로 존재하지 못한다는 아주 분명한 증거일 뿐이죠. 그저 연기같은 인생이며, 그저 흙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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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은 여기서 시작합니다. ‘난 하나님이 아니다.’, ‘난 실상 아무것도 아니다.’ 복음은 힘있는 자들을 더 힘있게 하는 도구가 아닙니다. 복음은 살아있는 자들을 윤택하게 하는 도구도 아닙니다. 복음은 “나는 스스로 존재할 수 없다. 나는 비참한 존재다. 잎사귀를 엮어 자신을 가리는 아담의 모습이 바로 나의 모습이구나”라고 인정하는 그 사람들에게 빛나는 십자가 되는 것입니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 나를 붙잡아라.” “나를 믿는 자를 내가 나의 아들로 삼을테니, 나를 믿어라.” 

 

왜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가난한 자들에겐 복이 있다”고 하셨겠습니까? 왜 예수의 사역의 대상은 늘 병들고, 보지 못하고, 걷지 못하고, 부모를 잃고, 남편을 잃은 사람들이었겠습니까? 복음이 바로 아무것도 없는 자들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무언가를 의존하지 않고선 살아갈 수 없는 사람들 말입니다.

 

여러분에게 복음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가난합니까? 아니면 여전히 스스로 존재하는 하나님입니까?

 

복음의 의미를 안다면, 우리는 의존해야 합니다. 아뇨. 의존하지 않고선 내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복음을 안다면, 돈을 의지할 수 없습니다. 아파트에 인생을 걸지 않습니다. 나의 쾌락을 위해 내 젊음을 허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굳게 하나님을 의지하게 됩니다. 스스로 계시는 분. 스스로 모든 것을 생산하시고, 채우시고, 늘 모자라지 않는 분을 의존해야 합니다. 그게 우리의 인생의 본질입니다. 부끄럽거나, 무능력한 인간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가장 인간다운 삶이 여기에 있습니다. 가장 믿을만한 대상을 의존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우리의 필요를 한 없이 채워주신다는 말이 아닙니다. 스스로 존재하는 대상 말고는 결코 우리를 만족하게 하고, 기쁘게 하는 대상이 없다는 거예요. 오직 스스로 존재하는 하나님 외에는 그 무엇도 우리를 우리답게 해주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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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우리 삶을 찬찬히 살펴보십시오. 오늘 우리는 무엇을 의지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무엇을 하나님 삼아 살아가며, 무엇이 나를 나 되게 한다고 믿고 살아갑니까?

 

여러분, 이 세상 모든 것은 그저 안개처럼 존재하다 사라질 것들입니다. 늘 낡고, 녹슬고, 점점 빛을 잃어가는 것들입니다. 아무리 그걸 부여 잡아도 언제간 변하고, 낡고, 사라집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 무엇도 영원히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그렇습니다. 

 

그러니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충만의 충만함이 되시는, 모든 것을 그 품에서 꺼내시고, 넣으시는 하나님 외에 무엇이 우리의 영원한 소망이 되겠습니까?  

 

 

 

 

landing. 

 

 

 

여러분이 처한 상황이 쉽진 않습니다. 영원함은 고사하고 오늘 하루 조차 힘이 나지 않는 나날입니다. 그래서 어디라도 불평을 쏟아 놓고 싶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오늘도 여러분 앞에 불붙은 떨기나무가 있지 않습니까? 나무를 태우지 않고, 연기도 나지 않지만, 끝없이 타오르는 불. 스스로 계시는 분. 그 분께서 여러분의 하나님이십니다.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께서 오늘도 너그러이 우리에게 어깨를 빌려주십니다. 그리고 친히 우리의 하나님이 되어주십니다. 늘 이 “스스로 있는 자”, “나는 나”라고 밖에 소개하실 수 없는 분이 여러분 앞에 있습니다. 

 

기억하고, 의지하고, 그 분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종교적 의무가 아닙니다. 그래야만 해서도 아닙니다. 그게 우리가 사는 길입니다. 가장 사람답게, 가장 나답게 사는 길입니다. 바울의 고백이 생각납니다. 

 

“모든 것을 해로여김은 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라”

 

저와 여러분이 “나”로 발견되지 않길 바랍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길 소망합니다. 스스로 계신 이 안에서 매일 매일 발견되기 원합니다. 그 분으로, 그 분 안에서 가장 나답게 살아가는 푸르른 젊음의 때가 되길 진심으로 바라고,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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