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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설교문 예시

고린도전서 15장 51-56절 부활절 설교 예시

by 진심설교코치 2023. 4. 2.

이 설교는 부활절에 실제 한 설교는 아니지만, 사도신경의 "몸의 부활"에 대해 다루며 부활의 의미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부활절을 앞두고 참고하시면 도움이 되실 것 같아 올립니다. 

 

오늘 설교 코칭

1. 절기 설교가 기대되지 않는 이유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1년에 52번 밖에 못하는 주일 설교가 의미 있게 흘러가려면 절기의 주제도  뻔하게 다뤄선 안됩니다. 

2. "부활이 무엇인가?"가 아니라 저는 "왜 다시 살아나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3. 뻔한 것은 누구나 듣기 힘듭니다. 목사님들, 전도사님들도 뻔한 설교 듣기 힘드신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시각과 시점 전환은 물론이고, 여러 시도들을 해서 메시지에 새로움을 불어 넣으셔야 합니다. 


 

다시 심장이 뛰도록

고린도전서 15:51-56

 

 

Opener. 죽음은 엔트로피의 증가

 

사람은 죽습니다.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한 교수가 이렇게 말합니다. “죽음은 비가역적인 엔트로피의 급격한 증가다.” 이게 무슨 말일까요? 비가역적이라는 건 되돌릴 수 없다는 뜻이고, 엔트로피는 무질서를 뜻해요. 어렵게 느껴지지만 별거 없습니다.

 

쉽게 말해볼까요? 죽음은 몸이 되돌릴 수 없는 무질서 상태가 된다는 거죠. 회복 해야하는 능력이 점점 무질서 해지고, 신체의 운동능력이 점차 무질서 해지고, 뼈의 자리가 무질서 해지는. 그래서 결국 모든 질서가 급속하게 무너지면서 사람은 죽게 됩니다. 

 

우리는 이 죽음을 체크하는 방법이 있죠. 심장이 멈추는 것. 이로써 사람은 모든 기능이 정지하게 됩니다. 

 

 

 

Chapter 1. 몸이 다시 산다는 것 = 다시 질서를 갖는 것 

 

 

그런데 우리는 “몸이 사는 것”을 믿습니다. 그 말은 무엇일까요? 우리의 몸이 다시 살아나는 것이죠. 그러니까 모든 무질서가 다시 질서를 갖게 된다는 말입니다. 낡았던 것이 다시 새 것이 되는 것이고, 멈췄던 심장이 다시 뛰는 것을 말해요. 그게 우리의 신앙 고백이에요. 몸이 사는 것을 믿습니다. 그럼 몸이 언제, 어떻게 살아날까요? 왜 다시 살아나야 할까요?

 

 

 

Chapter 2. 우리가 다시 살아나는 때

 

 

오늘 본문에 보니까, 그 때는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때라고 말하고 있어요. 52절에서 “나팔소리가 나매”라고 하죠. 그러니깐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는 날, 죽은지 수 천 년 된 사람부터 시작해서 어제 죽은 사람까지 다 살아나게 됩니다. 그런데 이걸 “변화”라고 말해요. 왜 그럴까요? 

 

다시 살아난다는게 아예 다른 몸을 입는 게 아니기 때문에 그래요. 쉽게 말해서. OOO가 죽었는데, 새로 만들어지는게 아니라는 겁니다. OOO라는 그 사람이 살아나는거죠. 그런데 이걸 뭐라고 성경이 말하냐면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 할 것을 입는다”라고 말해요. 그러니깐 아예 다른 존재가 살아나는게 아니라, 길동이, 영숙이, 민희, 승호인데, 지금과 같이 썩고, 또 죽어야 하는 몸이 아니라 이제 썩지 않는 존재로 살아나게 된다는 겁니다. 심장이 멈췄던 몸이 다시 심장이 뛰고, 피가 돌고, 숨을 쉬고, 죄가 다시 전기 신호를 보내서, 죽었던 신경들이 살아나고, 느끼고, 보고, 생각하고, 손가락 발가락, 팔 다리를 움직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전히 나지만, 새로운 몸을 입고 말입니다. 죄로 인해 망가진 우리의 몸이 아닌, 완전한 몸.

 

그리고 이를 통해서 예언이 이루어지는 거죠.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있느냐?” 사망이라는 것이 이제 우리에게 아무런 힘을 미치지 못하는 때가 온다는 겁니다. 이건 무슨 말이겠어요? 우리가 부활하면 더 이상 죽지 않는다. 다시는 죽지 않는다는 것이죠. 이걸 우리가 믿는 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살려주시겠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Chapter 3. 왜 다시 살아나야 할까?

 

 

그런데 왜 살아나야 하는가. 전 이게 정말 고민이었어요. 살아나는 것 좋아요. 그런데 왜 죽어야 하고, 왜 살아나야 할까요? 여러분, 새 몸을 입으면 뭐가 가장 좋을까요?

 

왜 우리가 다시 살아나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면 아무런 소망이 없기 때문이에요. 여러분, 우리는 죄인으로 살아요. 이건 단지 나쁜 생각을 가지고 산다는 것도 아니죠. 우리는 늘 만족하지 못하고 살아요. 게임을 해도 얼마 하면 지겹고, 연애를 해도 마음은 처음과 점점 달라지고, 식상해져요. 아무리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우리는 만족하지 못하고, 더 맛있고, 더 훌륭한 음식을 찾아 내야해요. 이게 다 뭐 때문에 생겨나는 현상일까요? 죄 때문이에요. 

 

그리고 진짜로 죄 많이 짓죠. 아무리 예수님 믿고, 기도하고, 변해보려고 해도 우리 안에서 샘솟는 이 죄의 욕구는 끝이 없어요. 사실 화를 안내도 되는 상황인데 어느 날은 엄청나게 화가 나고, 참을 수 있는 일인데도 어느 날은 폭발해 버리죠. 우리가 미워하는 대상들 생각해보면, 사실 그렇게 나쁜 짓을 하지 않는데 우리는 뭔가 모를 얄미움을 가지고 째려 보게 되고, 아무리 하나님께서 사랑하라고 말씀 하셔도 그 순간만큼은 진짜 마음으로 가서 한 대 때려 버리고 싶은 마음이 솟구치죠. 왜 그렇습니까? 우리의 죄 때문이에요. 

 

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야 할까? 다시 살아나지 않으면 계속 저리 살아야 하기 때문에 그렇죠. 사람은 지금 이 오염된 몸으로는 아무런 소망이 없기 때문에 그래요. 얼마나 인생이 고달파요. 미래를 향해 달려 가는 나를 잠시 내려놓고 생각해봐요. 왜 달리고 있을까요 우리는. 

 

여러분, 이 몸으로는 계속 죄를 지을 것이고, 아무리 발버둥 쳐도 우리는 결핍하고, 만족하지 못하고, 아쉽고, 후회되고, 스스로를 자만하고, 때론 비하하면서 살아갈 것이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활 시키십니다. 지금의 몸을 죽이고, 그 몸을 기초로 한 새 몸을 주시는 거예요. 그게 죽음과 부활입니다. 그러니깐 예수 믿는 사람의 죽음은 단지 비극이거나, 비참함이 아니에요. 죄의 굴레를 벗어버리는, 결핍과 불만족, 미움과 괴로움, 눈물과 모든 고통에서 자유하게 하는 하나님의 선물이에요. 다시 새 몸을 입히실 것이니까요. 

 

 

 

Landing. 기다려지지 않습니까? 

 

 

우리는 결국 죽습니다. 그러나 다시 새로운 몸을 입을 날을 고대하며 죽습니다. 영혼은 하늘에 있겠지만, 부활의 완성은 예수님 다시 오시는 날 새 몸을 입음으로 이루어집니다. 영원히 멈추지 않는 심장을 가지고 우리는 다시 태어납니다. 이 뿐만 아니라, 이제 죄를 짓지 않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고통스럽고, 후회되고, 고민스럽고, 아프고, 슬픈 일도 없습니다. 

 

에덴 동산에서 하나님과 거닐었던 완전한 사람이었던 아담처럼, 우리 역시 죽어 새 몸을 입어 아담처럼,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과 살게 됩니다. 이게 우리의 소망입니다. 우리의 믿음입니다. 기다려지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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