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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설교문 예시

고난주간 설교 예시 마 27장 27-31 새벽 설교

by 진심설교코치 2023. 3. 28.

동일한 본문 설교가 앞서 있습니다.

이 설교는 동일한 인사이트를 가지고 새벽에 장년 대상 설교입니다.

 

오늘 설교 코칭

1. 어른 설교와 어린이 설교의 차이는 인사이트의 차이가 아니다. 

2. 동일한 이야기지만 어른들이 더 오래 들을 수 있고, 더 추상적 개념을 잘 이해하며, 자기적용을 주체적으로 할 수 있다. 

3. 그러나 아이들은 짧게 집중 할 수 있고, 추상적인 개념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적욕점 역시 스스로 발견하지 못 할 수 있다. 

 

 

침묵하시며 우릴 향해 웃으시는 주

마 27:27-31
 
 
 

1. 예수님은 누구신가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삼위일체라는 것은 그 예수님이 성부하나님과 다르지 않다는 말입니다. 영광스럽고, 전능하시며, 전지하십니다. 요한은 요한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이 세상의 창조주이심을 선언합니다. 그가 없이는 된 것이 하나도 없고, 예수님에 의해 세상은 존재하게 되었다는 것이죠. 즉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이시고, 우리를 존재하게 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 무엇에도 고개 숙일 필요 없으신 분이시고, 그 어떤 것 앞에서도 주눅드실 필요조차 없으신 분이십니다. 당대의 초강대국이었던 로마 황제는 스스로가 신이라고 외쳐댔지만, 그것은 하나님이 비웃으실 일이었습니다. 감히 한낯인간이. 

 

 
 

2. 비참한 자리에 계신 예수님

 

그런데 그 예수님이 비참하리만큼 조롱당합니다. 차라리 제가 나서서라도 막아드리고 싶을만큼 비참한 자리에 이르십니다. 

 

총독의 군병들이 모였습니다. 총독을 보좌하는 로마군인데 대략 600명 정도가 된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의 순서대로라면 우리 예수님은 이미 채찍질로 인해 몸은 만신창이가 되었을 겁니다. 살점이 떨어져 나가고, 피투성이가 되었겠죠. 그런 예수님 주변으로 600명의 군인들이 모인겁니다. 


비웃기 위해 모인겁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옷을 벗깁니다. 그리고 홍포를 입힙니다. 이건 당시의 왕이 둘렀던 도포입니다. 그리고 가시로 엮은 관을 가지고 예수님의 머리에 씌웁니다. 그리고는 갈대를 가져다가 예수님의 손에 쥐어줍니다. 홍포도, 관도, 갈대도 왕의 상징입니다. 왕이 걸쳤던 홍포, 왕이 쓰던 관, 왕이 들었던 규.


그들은 지금 예수님을 조롱하고 있는 것이죠. 비웃고 있는 겁니다. 그 600명의 군인들이 예수님 앞에서 무릎을 꿇고 외칩니다.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유대인의 왕 만세!

 

그리고는 예수님에게 침을 뱉습니다. 주변에 있던 로마군인들이 예수님께 침을 뱉아댑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손에 쥐어졌던 갈대막대를 빼앗아 예수님의 머리를 때립니다. 그리고 요한보음에 보면 주먹으로 예수님을 때렸다고 말하고 있어요.

 

 

3. 예수님은 참으셨다

 

전능하신, 전지하신, 영광스럽고, 모든 것을 만드시고, 모든 것의 시작이고 끝이신 분이.. 피투성이가 되어 지금 로마군인들에게 조롱당하고, 맞고, 침뱉음 당하고 있습니다. 왜 일까요? 전 정말 우라통이 터집니다. 그냥 말 한마디 하면 모든 것이 끝날텐데. 아니 그 말 한마디도 하지 않고도 모든 것을 제압하실 수 있을 텐데. 왜 예수님은 로마군사들 앞에서 저런 모욕과 수치를 당하시고 계신가. 왜 하나님이심을 드러내지 않고 가만히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침묵하고 계신가. 

그 이유는 요한복음을 통해 알아보겠습니다. 지금과는 조금 다른 모습을 보여주셨던 적이 있었어요. 예수께서 신적능력을 사용하셨습니다.

빌라도에게 끌려오기 좀 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다가 유다와 함께 병사들이 와서 예수님을 체포하러 왔을 때입니다. 함께 찾아 봤으면 좋겠습니다. 

요한복음 18장입니다. 예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 오르셨습니다. 이제 곧 잡혀갈 것도 아셨죠. 아니나 다를까 유다와 대제사장들이 보낸 사람들이 무기를 들고 동산으로 왔습니다. 그런데 이 때 예수께서 그들에게 신적 능력을 사용하십니다. 컴컴한 숲에서 예수님께서 앞에 서있는 그 병사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그니라” 그런데 아주 중요한 장면을 요한은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요 18:6입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내가 그니라 하실 때에 그들이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지는지라” 예수께서 “내가 그니라” 말씀하실 때, 그 어떤 무기도 힘을 쓰지 못했습니다. 그저 그들은 그 신적 선언 앞에서 무릎을 꿇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발휘하셨을까요.

18:8-9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에게 내가 그니라 하였으니 나를 찾거든 이 사람들이 가는 것을 용납하라 하시니 이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 중에서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결국 예수께서 그 신적권위로 그들을 제압하신 이유는, 제자들을 도망치도록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들이 도망갈 시간을 벌어주고, 그들이 뒤도 안돌아보고 꽁무니를 뺄 수 있도록 오직 그들이 예수님만 잡아가도록 하신 것이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도망치도록 하시기 위해 신적 능력을 사용하셨지만, 정작 당신이 당할 고난과 치욕과 수모 앞에서는 그 어떠한 능력도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4. 왜 예수님은 로마 군인들의 모욕 앞에서 참으셨는가?

 

오늘 본문에서 예수께서 가만히 계신 이유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아버지께서 주신 자 중에서 하나도 잃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이 구원하시고자 하신 이들을 구원해내기 위해서. 왜 고난을 당하고, 살점이 떨어져야 하는지 우리는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은 왜 이토록 처절한 방법을 사용하셨는지 도무지 알수 없지만, 하나님이 그리하기로 결정하셨고, 예수님은 그 방법 앞에서 잠잠히 이 모든 고난을 당해내시는 것이죠.

순전히 우리를 위함입니다. 우리를 살리기 위함입니다. 3년간 함께 했던 제자들을 줄행랑 칠수 있도록 시간을 벌어주고, 모든 시선을 자신에게 집중시킨 그 예수님께서 결국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 오늘 우리를 위해 그리 하신 겁니다. 

예수님의 눈에는. 예수님의 마음에는. 자신의 살점이 떨어져나간 것이나 철철 흐르는 피는 안 보였을테죠. 로마군인의 조롱과 그들의 비웃음이 보이지 않았을 겁니다. 그저 예수님의 참음으로 기쁨을 누릴 우리만 보였던 겁니다. 

오늘 이 새벽에, 어느덧 이 사랑이 우리 마음에 마치 화석과 같은 이야기가 되지 않았는지 살폈으면 좋겠습니다. 제자들을 도망치도록 하기 위해 “내가 그니라” 외치셨던 그 예수님을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로마군인의 온갖 조롱과 비웃음 앞에서도 묵묵히 참고 다 받아내셨던 예수님을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아침은 다른 기도제목보다 그저 그 예수님 많이 생각하고, 많이 감사하는 아침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위해서만 하나님의 힘을 사용하시고, 우리를 위해 무력하셨던 그 예수님 앞에서, 우리가 얼마나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지를, 우리가 얼마나 예수님을 사랑하지 못하는지를 선명히 발견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 수치와 모욕은 결국 우리가 받았어야 할 것 임을 생각하시길 바랍니다. 우리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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